“Narrative Ethics” in Narrative Ethics: The Role of Stories in Bioethics

Martha Montello, “Narrative Ethics,” Narrative Ethics: The Role of Stories in Bioethics, special report, Hastings Center Report 44, no. 1 (2014): S2-S6.

  • Hastings 2014 Special Report 첫 논문의 완역입니다.
  • 책자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므로 논문 하나 완역은 저작권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추후 문제가 되는 경우 삭제할 수 있습니다.
  • 모든 저작권은 저자인 Martha Montello에게 있습니다. 한글 표현과 어휘는 관해서는 서사 의학 문헌에 기반해서 선택했습니다.

초록

서사 훈련을 받은 윤리학자인 나는 여기서 다시 선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미심적다. 사건이 벌어진 지 이 주가 지났는데도. 그때 윤리 자문을 구했으면 뭘 할 수 있었을까? 의사 선생의 질문 중 하나는 이렇다. “이걸 더 잘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어려운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서사적 접근이 도움이 될까? 서사주의자(narrativist)는 철학자, 법률가보다는 원칙, 규칙, 법에 초점을 덜 맞춘다. 법을 무시해도 된다거나, 생명윤리 원칙을 몰라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까? 서사는 참여의 방식이며, 법이나 철학이 도덕적 행위성, 맥락, 가치에 관해 묻는 것과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에세이

오후 늦게, 종양학과의 선임인 다시 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시간 있어요?” 한 시간 동안 그는 서부 캔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온 73세의 은퇴한 선생님, 그래먼 씨에게 2주 전에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8개월 전 비소세포 폐암으로 진단받은 그는 다시 선생의 환자였다. 의지가 강하고 확고한 사람이었던 환자는 자신을 “싸움꾼”이라고 부르며, “암을 때려 눕힐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5개월 동안 수술 전 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를 병행했다. 우하단 엽 절제술에 성공했고, 광범위한 조직 검사에서 암의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먼 씨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다시 선생은 신이 났다.

하지만 3일 뒤, 그래먼 씨에게 폐렴과 폐수종이 생겼다. 다시 선생은 희귀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환자는 회복하려 안간힘을 썼기에 “삽관에 긴장했다.” 그날 저녁, 치료 대리인의 권한을 가지고 있던 그래먼 씨의 첫째 딸이 다시 선생에게 와서 사전 지시서를 내밀었다. 2년 전 즈음 아버지가 서명한 지시서에는, 삽관 거부 지시가 담겨 있었다. 딸은 완화 치료 상담을 원했고, 즉각 삽관을 제거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먼 씨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다시 선생은 당황하고 화가 났다. 그는 인공 호흡 장치 하에서 3일 동안 지켜보고 폐렴이 낫지 않으면 삽관에 관해 다시 논의할 것을 권했다.

팀은 다음 날에 완화 치료 팀을 초대해 가족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딸들은 그래먼 씨가 인공 호흡 장치에서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사전 지시서에 아버지의 소망이 확실히 기록되어 있으니, 따르는 것이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완화 치료 팀은 마지못해 서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언을 건넸다. 그래먼 씨의 삽관은 제거되었고, 곧 사망했다.

2주 뒤, 환자의 딸들은 슬퍼했지만 선택과 아버지의 치료에 만족해했다. 그러나 다시 선생은 좌절과 분노에 싸여 있었다. 완화 치료 팀과 딸들 사이에서 의사 결정의 충돌이 발생한 것, 딸들에게 자신을 “전달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실망시켰어요”라고 다시 선생은 환자들에게 말했다. “계속 생각이 나네요. 옳은 일을 한 걸까요?”


서사적 접근

서사 훈련을 받은 윤리학자인 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선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미심적었다. 사건이 벌어진지는 이 주가 지났지만, 당시에 윤리 자문을 요청했던들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의사 선생의 암묵적인 질문 하나는 이것이었다. “더 잘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어려운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서사적 접근이 도움이 될 것인가?

서사학자는 철학자, 법률가보다는 원칙, 규칙, 법에 초점을 덜 맞춘다. 법을 무시해도 된다거나, 생명윤리 원칙을 몰라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율성의 원칙과 대리적 판단의 규칙에 따르면, 그래먼 씨는 큰 딸에게 대리 의사 결정 역할을 맡길 권리가 있다. 딸은 선택할 법적 권리가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까? 서사는 참여의 방식이며, 법이나 철학이 도덕적 행위성, 맥락, 가치에 관해 묻는 것과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서사적 접근은 어려운 선택을 마주한 다른 가족들처럼 그래먼 씨 가족이 지금 마주한 도덕적 곤경에 어떻게 처하게 되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어떻게 되었는가를 이해함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최선의 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해는 좋은 문학 작품에서 배울 수 있는 이해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잘 쓰인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도덕적 세계의 깊이, 미묘함, 복잡함을 보여준다. 등장 인물 한 명이나 여럿이 현재의 위치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를 풀어 나갈 때 이런 것들이 나타난다.

토니 모리슨의 “푸른 눈동자”(The Bluest Eye) 서두에 이야기가 보여줄 수 있는 도덕적 역할의 실마리가 보인다. 두 개의 짧은 문단에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 클라우디아는 어릴 때의 어둡고 떨리는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자신의 노력을 우아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지켜온 것만큼이나 조용하게, 1941년 가을에는 천수국이 피지 않았다.” 다시 선생처럼, 그녀는 과거의 사건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그녀는 다시 선생처럼,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다.

간결한 사실과 이야기의 뼈대 만을 나열한 후, 그녀는 마지막 두 문장을 읊는다. “이젠, 더 말할 게 없다. 왜를 묻는 것만 남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너무 어려워서, 어떻게의 질문으로 도망간다.” 어떻게에는 강조 표시가 있다. 마지막 문장 세 단어를 통해 모리슨은 이 도덕적 비극에서 무엇이 벌어졌는지를 파악하려면,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곤경에 사람들은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는가? 화자는 일어난 일 때문에 영원히 변해버렸지만 여전히 어떻게를 이해하기 위해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윤리 자문은 여기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묻는 것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데 집중하곤 한다. 서사적 접근은 이런 지시성에서 한걸음 물러나, 지금 위치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에 관해 성찰하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가 서사적 사고에서 작동하는 방식의 핵심은 라틴어의 탈격(奪格) 형식과 비슷하다. 명사의 다섯 가지 격변화 중에서 탈격은 “어떻게”의 의미를 지시한다. 이때, “어떻게”는 “~에 의하여”를 가리킨다. “황소에 의하여 농부는 밭을 갈았다”라는 문장을 라틴어로 쓴다면, “황소”(“bovem“)의 어미는 탈격 형식을 띄게 된다. 황소에 의하여 밭을 갈았다는 것을, 밭갈기가 일어난 방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푸른 눈동자”에서, 화자 이야기의 급박함과 특이성은 그녀가 이런 “어떻게”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리슨은 독자들에게 이런 방식의 이해가 이야기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보여준다.


문제 지도

도덕적 사고에 관한 “어떻게”의 접근은 마사 누스바움의 “사랑의 등정”(Love’s Knowledge),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After Virtue)이 주장하는 도덕적 사고와 같다. 이 철학자들은 도덕적 삶의 어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개인의 삶이 어떻게 특유의 도덕적 곤경에 다다렀는지 알기 위해서는 서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서사의 묶음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래먼 가족과 같은 경우, 서사주의자는 그들이 이런 특별한 결정에 도달하게 된 방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 결정에 앞서 삶에서 벌어진 다른 중요한 순간들에 내린 도덕적 결정을 어떻게 내리게 되었는지의 이야기를 듣고자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서사주의자는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을 필요로 한다. 필요한 것은 소설가 레베카 골드스타인이 “문제 지도”라고 부른 것이다.

1983년 소설 “심신 문제”(The Mind Body Problem)에서, 골드스타인은 문제 지도를 “거주자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엄청나게 문제가 되는지에 관한 … 인식을 투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각각의 문제 지도는 개별적이고 독특하다. “똑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다른 입장에서 보면 다르게 보여서 영토 사이의 소통을 어렵게 만들곤 한다.” 골드스타인의 소설을 읽은지 몇 년 뒤에, 나는 첫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읽어주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문제 지도의 가장 좋은 예 중 하나가 “곰돌이 푸우”(Winnie the Pooh)의 속표지임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크리스토퍼 로빈에게 엄청나게 문제가 되는 “100 에이커 숲”이 그려져 있다. “아울의 집”, “이요레의 우울한 방” 등 장소 말고도, “쪼쩨비가 없는 곳”처럼 사건에 관한 기억도 담겨 있다. 그림은 이 장소와 순간이 왜 크리스토퍼 로빈에게 문제가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크리스토퍼 로빈의 문제 지도에서 독자는 그에게 중요한 것 뿐만 아니라 그가 선택해온 것을 통해 그가 시간, 에너지, 사랑을 쏟는 방식 또한 파악할 수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의 원형이 여기 담겨 있다.

우리 머릿속에도 비슷한 지도가 있다. 우리는 크리스토퍼 로빈처럼, 각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통해 지도를 만든다. 다른 삶의 의미를, 그 선택과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사적 역량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야 한다. 서사적 역량은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문제 지도가 가진 지형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여기에서도 문학이 도움이 된다. “곰돌이 푸우”에서 더 복잡한 서사로 나아가자. “샬롯의 거미줄”(Charlotte’s Web),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에서, 우리는 등장 인물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따라간다. 윌버와 스카우트를 통해, 그리고 동화, 가족 서사, 복잡한 소설에서, 우리는 깊은 외로움을 마주하는 다양한 방식, 삶의 특별한 순간을 넘어서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용기를 살핀다. 잘 지어진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덕적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을 배운다.


서사 윤리의 방법: 문제 지도 만들기

환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제 지도를 만드는 것은 서사 윤리의 방식을 보여준다. 시간은 부족하고, 목표는 명확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엄청난 문제는 무엇인지를, 말하는 사람이 설명하는 삶의 세계에서 분별하는 것. 이를 위해, 주의 깊은 청자는 좋은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서사적 역량을 활용한다. 읽기에서처럼, 우리는 특히 유용한 서사의 네 가지 요소, 목소리, 등장 인물, 플롯, 해결에 의지한다. 좋은 이야기 모두에 나타나는 이 네 가지 요소는 읽고 듣는 이야기의 문제 지도를 만들 수 있게 해준다. 또, 네 가지 요소는 이야기가 어떻게 도덕적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목소리에 초점을 둘때, 우리는 누가 이야기를 하는지를 묻는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우리는 이야기의 묘사가 누구의 관점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문학 이론가들은 “목소리”와 “관점”을 구분하곤 하는데, 삼인칭 화자가 다른 사람의 관점에 머무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상 윤리에서 두 긴밀하게 연결된 요소는 보통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물어보는 것이 편리하다.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듣는 것은 누구의 관점인가?”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은유적 형태가 이야기하기에서 진리라는 것을 안다. 관찰자는 반드시 대상을 왜곡한다. 우리는 궁금해하게 된다. “당신은 왜 이 이야기를 하나요? 왜 지금이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상황은 무엇이었나요?”

모든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므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경험의 진실에 관한 전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여러 견해, 관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수의 서사를 해석할 때에는 단일의 직선적 서사를 해석할 때보다 더 큰 서사적 역량이 필요하다. 이런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려운 문학 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다. 윌리엄 포크너는 다수의 서사를 통해 진실에 도달하는 것에 있어 대가이다. “소리와 분노”(The Sound and the Fury)에서 그는 콤슨 가족의 몰락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네 개의 목소리를 활용한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As I Lay Dying)에서는 엄마의 죽음이 띠는 의미를 검토하기 위해 21개의 목소리를 사용한다. 좋은 소설가처럼, 우리는 신뢰할만한 화자, “좋은” 역사가의 신화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역량있는 독자로서, 우리는 이야기를 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균열과 결여된 목소리를 듣고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등장인물에게 집중할 때, 우리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누구인가” 또는 “누구의 이야기인가”를 묻는다. 의학과 생명 윤리에서 가장 피해가 큰 도덕적 오류 중 하나는 의사의 이야기가 환자나 가족의 이야기를 대체하거나, 가족의 이야기가 환자의 이야기를 대체할 때 나타난다. 다시, 우리는 이야기의 대가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카퍼필드”(David Copperfield)는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일지, 그 역할이 다른 누군가의 것일지, 이 책이 알려줄 것이다”로 시작한다. 디킨스는 등장인물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누가 이야기의 중심인지, 또는 중심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항상, 또는 보통, 방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이거나, 임상 윤리의 경우, 자문을 요청한 사람이다.

결핍된 목소리처럼, 우리는 놓친 등장인물이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이 중심에 있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그 사람의 문제 지도에 다른 누가 속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밀른이 이것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중요한 등장인물은 100 에이커 숲의 지도에 나와 있다. 그러나 환자와 가족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균열이 있곤 한다. 우리는 누구를 놓쳤는지 찾아야 한다.

플롯에 초점을 맞출 때, 진행하는 이야기는 기대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는 다른 것 때문에 일어난다. 이야기는 사건의 내포적 이유를 제시한다. 프랭크 커모드는 이야기의 구조를 시계의 똑딱 소리에 비교하였다. 똑은 매번 딱의 기대를 만든다. 플롯은 놀라움, 똑 다음에 딱이 나오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런 딱 없는 똑 이야기는 의료에서 자주 나타난다.

중병이나 상실은 삶의 이야기를 깨뜨린다. 그것은 똑딱 연쇄를 중단시킨다. 의사이자 윤리학자인 하워드 브로디는 환자가 공통의 청원을 가지고 방문한다고 썼다. “내 이야기가 망가졌어요. 고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도덕적 결정과 관련하여 환자와 일할 때, 우리는 동일한 필요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삶의 이야기가 무결성 또는 가치 체계나 문제 지도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많은 경우 이야기를 개정하거나, 기대하지 않은 질병이나 상실로 꼬인 플롯을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그들이 행복 또는 최소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길 원한다. 다음 장이 마지막 장인 경우도 있다.

임상 윤리에서 우리가 만나는 많은 이야기의 중앙에는 심각한 파열이 있다. 린 샤론 슈바르츠의 소설 “장의 혼란”(Disturbances in the Field)은 제목을 물리학의 장이론에서 빌려왔다. 그는 장의 혼란 개념을 가지고 끔찍한 비극에 처한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서술한다. 복잡한 문제 지도를 설명하는 것 같은 표현을 쓰면서, 그는 독자들에게 장이란 한 사람을 그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장소나 어떤 정적인 것이 아니다. … 장은 사람들을 그 자신으로 만들며, 한 순간 그들의 필요와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이다. … 일어난 모든 것은 장 속에서 일어난다. 장은 항상 만들어지고 변한다. … 경험을 필요와 충족, 또는 미충족의 연속이라고 생각해보라. … 이상적으로, 필요가 충족되면, 그것은 뒤로 물러난다. … 단순한 신체적 필요를 넘어가면, 누군가의 모험은 완성되며 당신은 다음을 위한 준비가 된 것이다. 다음 필요가 생기고, 모든 것은 반복된다. 만약 … 장에 혼란이 있지 않다면. 만족되지 못한 필요는 특별하다. 당신을 나가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슈바르츠의 소설에서는, 통학 버스에 사고가 나서 주인공의 아이들이 갑자기 죽는다. 사랑과 필요의 똑 다음에 딱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리페테이아”라는 말을 사용하여 우리가 환자, 가족에게서 목격하는 기대의 갑작스런 역전을 설명한다. 갑자기, 남편이 전이 전립선 암으로 진단받는다. 기울어진 차에 엄마의 머리가 깨진다. 부부의 아기가 23주에 태어난다. 페리페테이아가 일어난 곳을 안다는 것, 그것이 이 사람의 삶에 발생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다. 문제 지도를 그리고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서사 모형: 해결

어려운 임상 윤리 사례를 해결하는 것은 퍼즐 조각을 모두 맞추는 것과 같은 문제 풀이와는 다르다. 서사 윤리의 해결이라는 방식은 음악에서 해결이 의미하는 것에 더 가깝다. 불협화음에서 협화음으로 진행하는 것. “진행”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자주, 우리가 만나는 이야기는 떠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진행되고 있는 극의 단역이며, 환자와 가족의 삶 서사에서 한 장면 또는 한 장에 등장할 뿐이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하는 짧은 시간을 통해, 환자와 가족이 현재의 비극이나 공황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협화음의 개념은 잘 쓰인 비극 소설의 결말과 비슷하다. 진정으로 행복한 결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려운 임상 윤리 사례는 우리의 모든 선택은 나쁘거나 슬프며 그 중 가장 피해가 적은 쪽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이 틀 안에서, 우리는 엮인 사람들의 삶과 선택에서 협화음의 패턴을 찾는다.

커모드는 “종말 의식과 인간의 시간”(The Sense of an Ending)에서, 좋은 결말이란 “시작, 중간과 만족스러운 협화음을 내는 것”이며, “대상 그 자체에 대한 뚜렷한 경의”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환자와 가족의 문제 지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야기의 요소가 합쳐지며 불협화음에서 협화음으로 나아가는 데에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는 독자처럼, 우리는 무언가 열리는 느낌을, 새로운 이야기가 막 시작했음을 알게 된다. 현재의 슬픔은 가족, 공동체 등 더 큰 이야기의 패턴과 연결되면서 열림으로 작용한다. 해결은 의미, 목적, 참여가 깊어지고, 서사의 끈 하나 대신 다른 것을 찾을 때 도래한다.

서사적 접근은 오늘날 임상 윤리를 주도하고 있는 접근처럼 체계적이지는 않다. 서사 윤리의 도덕적 결정 틀은 네 개의 상자나 네 개의 원칙으로 깔끔하게 도식화할 수 없다. 서사 모형의 네 가지 요소, 목소리, 등장인물, 플롯, 해결에는 합리적으로 추론한 결과에 관한 기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윤리학자는 서사적 요소를 문제 지도를 만들기 위한 질문으로 활용한다. 윤리학자는 앞의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유연하게 움직이며, 하나 하나가 표면에 드러났다가 물러나게 하고, 앞뒤로 움직여 이야기를 파악하고 해석하려 노력한다. 네 번째 요소,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여기에 화자가 동행하기를 바란다.


서사 모형이 다시 선생을 도울 수 있을까?

다시 선생은 그래먼 가족과 문제 지도를 그릴 필요가 있었다. 다시 선생의 경우 다수의 문제 지도가 가능성을 넘어 중요한 것으로 다가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그래먼 씨의 딸들과 만든 지도, 아버지의 도덕 세계에 관한 지도였을 것이다. 딸들이 내린 결정은 바뀔 수도, 바뀌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덕적 질문과 절차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었다. 이 차이는 딸들과 의료 팀이 자신의 과업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해결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앞서에서 처럼 목소리에 관해 질문해보면,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빠져 있다는 것과, 그 빠진 목소리가 어떻게 문제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공황 상태에서 다시 선생이 들은 목소리는 딸들의 목소리였다. 의무기록에서 그래먼 씨의 아내가 이 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이야기의 그 부분에 살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먼 씨 아내의 목소리가 차이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 환자 사망 일주일 후, 간호사가 와서 그래먼 씨의 아내가 암 수술 이후 3개월 동안 인공 호흡기에서 고통받다가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직후에 그래먼 씨가 사전 지시서에 서명했던 것이다. 딸들은 아버지에게 인공 호흡기를 달지 않기로, 그런 방식으로 죽도록 놓아두지 않기로 진심으로 약속했던 것이다.

등장인물에 관해 묻는 것은, 그래먼 씨가 삶에서 무엇을, 누구를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이해하는 것의 복잡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는 “싸움꾼”이었고, 치료 과정에서 “이걸 때려눕힐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또한 딸들을 깊이 염려하는 사람이었다. 그 삶의 페리페테이아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딸들이 아버지에 관한 어려운 선택을 마주했을 때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서로에게 어떤 약속을 했는지였다.

몇 달 간의 고통을 볼 때, 그래먼 씨는 인공 호흡기를 제거하는 것을 강하게 밀어 붙이는 것보다는 그로 인해 딸들이 더 고통받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딸들은 아버지가 인공 호흡기를 달고 있다가 죽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간병인에게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라고 몇 번씩 말했던 것이다. 그래먼 씨 사망 이 주 뒤 나와 다시 선생이 그린 문제 지도는 그의 딸들이 연대와 사랑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 한 남자가, 약속에 신뢰를 부여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다시 선생에게 오후에 연락을 받고 나서, 나는 해결에 집중했다. 그의 죄책감이 딸들이 말하려 했던 이야기의 요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그 목소리들을 꼭 들어야 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그는 딸들이 다르게 생각하도록 만들 수도,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래먼 씨에 관해 아는 것, 딸에게 들은 것을 통해 문제 지도를 만들면서, 다시 선생은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관해 중심을 다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서사적 의미의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 다른 질문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합의가 아닌 협화음으로. 그는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기를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가족이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를 받아들이고, 그들 편에서 이쪽이 좋았다고 인정하게 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읽고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엄청난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말하고 있는 사람, 유일한 개인, 자신의 특유한 도덕적 세계에 살며, 어려운 선택을 마주한 그에게. 사람들, 가족들이 어떻게 지금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물으면서, 우리는 도덕적 에너지를 동정심에 맞춰, 삶의 순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References

T. Morrisson, The Bluest Eye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70), iii-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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